그들이 설계하는 법 2, LAK v.313, 2014
글, 그림 김현민
스튜디오일공일 소장/공동대표
이 글은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 313호(2014.05)에 개재되었던 글의 원고입니다. 잡지에 개재된 글과는 일부 내용이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1.
조경 디자인은 순수예술과는 다르다. 조경설계 수업 첫 시간이면 교수님께서는 어김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수반하게 되고, 대부분의 조경 디자인이 공공public이라는 보편적 이용자, 즉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조경 디자인은 순수예술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경을 처음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합리적 디자인과 체계적 설계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신 이 말은 종종 뜻하지 않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2.
첫 번째 오해는 설계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조사survey, 분석analysis 과정에서의 지나친 객관화客觀化이다. 행위의 목적과 대상이 순수예술과 다를 뿐이지, 사실 조경 디자인 역시 설계자 개인의 ‘주관主觀과 감흥感興‘에 의한 창작행위라는 본질은 순수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지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잠재력과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장소를 이용할 사람들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공간과 기능,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 일반적인 디자인의 행위에서 ‘설계자’는 이 모든 과정의 가장 중요한 행위 주체이며, 각각의 단계에서 설계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특히 조사와 분석 과정은 향후 디자인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될 ‘대상지에 대한 설계자의 관점’을 형성해 가는 첫 단계로서 ‘대상지만의 무엇‘을 발견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종종 이 과정은 대상지에서 받은 설계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흥은 배재된 채, 대상지의 객관적인 정보만을 수집하고 이를 종합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조경은 순수예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대상지에 대한 지나친 객관적 자세는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내용들만으로 대상지를 바라보게 만들어 대상지만의 잠재력 찾기를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경우, 잠재력보다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쉬운 문제점에 치중한 나머지 대상지와 설계자의 관계를 마치 대단한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학생작품의 심사를 가면, 대상지를 마치 ‘문제점 덩어리’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러한 작품들은 대개 ‘문제해결식’의 단편적이고 기능적인 설계로 이어지기 쉽다.
[그림1] 소쇄원. 장마 뒤 어느날 소쇄원에 갔다가 찍은 사진에 이미지 작업을 하였다. 그날의 소쇄원은 그동안 내가 알아 왔던 차분하고 소담스런 모습과는 달랐다. 장마가 지나간 계곡은 꽤나 역동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한 장의 현장사진도 간단한 작업을 통해 그날의 감흥을 담는 소중한 기록장치가 된다.
3.
조사와 분석 과정은 설계자가 대상지에서 발견하고 느낀 ‘감흥‘을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될 때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 객관적인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만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대상지를 볼 때, 발견될 수 있는 잠재력의 폭이 확장됨은 물론, 차별성 또한 얻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개인의 판단은 그동안 개인이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담아온 지식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개인만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같을 수 없고, 그 인식의 폭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더더구나 개인의 감정은 선천적인 성향이나 무의식과도 결합되어 그 폭을 더욱 확장시킨다. 예를 들어, 고흐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La Nuit Étoilée’이라는 작품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실제로 고흐의 눈에는 밤하늘이 저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상지에 대한 다른 시선은 결국 차별적인 디자인으로 연결되는 첫 단추가 되며, 대상지에서 느낀 주관적인 감흥은 소중한 단서가 된다.
[그림2] 경춘선. 그날은 하필 비가 왔다. 은퇴한 철도역의 모습이 더욱 처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장을 돌아보면서 깨달았다. 우 연히 카메라를 줌인 한 채 땅바닥의 사진이 찍혔다. 내가 눈 여겨 보지 못했던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과 벗겨진 페인트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경계석과 보도 틈새를 메꾸고 있는 이끼들, 흩어진 골재들, 우둘투둘 드러난 콘크리트 입자들, 갈라진 목재 침목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이러한 미세한 경관들이 모여 화랑대역의 처연한 경관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지들의 간단히 조합만으로도 대상지에서의 생각과 감흥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림3] 하남미사지구 보금자리지구 현상설계. 하남미사의 과거 경관을 상상해 보았다. 공장과 창고로 채워지기 전의 미사리는 아마도 넓은 논과 조각숲이 한가롭게 펼쳐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상지에서의 떠오른 모습들을 간단한 이미지로 기록한다. 텍스트보다 시각적 언어는 또 다른 감흥을 재생산한다.
[그림4] 료안지龍安寺. 한 무리의 여행객들에 밀린 채 마루에 뒤편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무리가 지나가고 나니 시야가 트이고 정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좀 더 나가면 마루에 앉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또 한참을 서있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임이 없다. 그 안쪽으로는 사람들이 서성댄다. 마루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고, 포토샵에서 투명도를 주고 합성해 보았다. 별 다른 설명이 없이도 사람들의 겹쳐진 이미지는 공간구조와 행태를 알려 주는 단서가 되고, 그날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는 매체가 된다.
4.
실제로 많은 작업들이 이러한 대상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흥과 그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대상지의 현황도면을 통해서든, 대상지의 현장에서든 느껴진 작은 느낌들,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흥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그 ‘왜?‘라는 호기심들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일반적인 조사과정의 객관적 리스트들은 이 과정 속에서 역으로 대입되어지고 내가 느낀 감흥과의 영향관계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의미를 보다 합리적으로 정의하는 도구로서 활용된다. 예를 들어 하남미사 보금자리지구 도시기반시설 현상설계의 주요 개념이 된 남겨진 논 지형의 시스템은 현장에서 느껴진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친근함’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논으로 남겨져 있는 부분이 매우 작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마다 놀러 가서 뛰어 놀았던 시골의 논두렁에 대한 기억과 결합되며 남겨진 농지 지형의 구조적 흔적들은 새로이 발견되고, 그 의미와 기능과 역할에 대한 호기심은 이것이 그린벨트라는 제도적 한계가 만들어 낸 대상지만의 독특한 지역 경관vernacular landscape이자, 과거의 그 정겨웠던 경관을 행태적 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도 복원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로부터 계획안만의 개념과 설계 전략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림5] 압구정 숲 공원. 대상지의 항공사진, 주변 현황사진 등을 조합하여 가장 일상 속에 있는 대상지이지만 그 일상 속에 숲이 없음을 강조하고, 일상 속으로 숲을 가져오자는 개념을 담아보았다. 이러한 포스터식의 작업들은 개념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을 주지만, 이야기를 담고 있어 개념을 전달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그림6] London to Rye Bay Landscape Map. 런던에서 라이 베이로 가는 길에 존재하는 주요 경관요소들을 맵핑하고 이를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경관지도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맵핑은 정보의 2차적 조직화 과정을 거친 개인화된 지도로, 단순히 대상지 정보를 지도형식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5.
‘조경이 순수예술과는 다르다’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오해는 디자인 과정의 지나친 체계화體系化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오랫동안 배워 왔던 조경 디자인의 체계는 조사survey-분석analysis-디자인design의 단계로 이루어진 이른바 SAD Process이다. 이 전통적인 디자인 체계는 각각의 단계가 마치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만 하는 선형적 절차linear process이며, 마치 머리-가슴-배의 곤충 구조처럼 분절된 독립적 단계individualized phase인 것과 같은 오해를 만들곤 한다. 물론 처음 설계를 배우는 학생인 경우는 이러한 기본적인 체계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생각을 그리는 디자인 행위에서 생각은 조사-분석-디자인의 반복적 피드백의 과정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순식간에 일어난 생각, 직관直觀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항상 이해해야한다.
[그림7] Roebling Community Design. 커뮤니티 주변의 녹지 체계 분석을 통해 추가적으로 공원 또는 녹지가 필요한 곳을 선정하고자 하였다. 구간별 생태등급을 나누어 이를 그래프화하고, 그래프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곳에 생태적 버퍼 설치를 제안하였다. 때로는 생각을 검증하기 위한 방법들도 새롭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림8,9] 구의 어린이 공원. 대상지의 공시지가(위) 및 대상지로의 대중교통 현황(아래)과 같은 통계적이고 객관적 정보들도 표현 방법을 달리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강한 개념 언어로 발전된다. 3D 그래프로 그려진 공시지가는 심리적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는 공원의 경제적 가치를 생각하게하고, 대중교통의 과장된 표현은 쇼핑 이용자의 공격적인 성향을 담고자 하였다.
6.
전통적인 설계과정이 갖는 더 큰 문제는 디자인design이라는 행위를 마치 조사와 분석 단계와는 상관없는, 조사-분석 후의 단순히 계획안을 그리는 행위로만 한정짓는 듯 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하는 설계 현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사와 분석의 단계를 객관적 정보 혹은 주관적 정보를 바탕으로 설계자의 대상지에 대한 관점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흔히 행하고 있는 화살표와 버블만으로는 사실 그 복잡한 관계성을 정리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 더더구나 설계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흥과 같은 무형의 정보인 경우 그것을 설계적 언어로 담기에 적합한 방법부터가 디자인되어야 함에도 그 같은 노력에는 매우 인색하다.
7.
설계 수업을 하다보면, 본인의 생각을 머리로만 정리하려는 학생들을 종종 보게 된다. 생각을 글로 쓸 때 정리가 쉬운 것처럼, 디자인적 사고는 다이어그램과 같은 시각적 설계언어로 표현될 때 더 효과적이다. 이는 스터디 모형을 통해 경관 구성 요소들 간의 3차원적 관계성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모형은 보다 구체적인 시각화 과정으로 설계자가 평면적인 설계에서는 알 수 없었던 설계적 오류를 확인하고, 비교하고, 수정해 가면서 효과적으로 디자인을 검증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 도구가 된다. 마찬가지로 다이어그램 역시 설계자가 시각화과정이라는 자신만의 언어에 의한 의미부여 과정을 거처 생각을 디자인함으로써 자신만의 관점을 보다 효과적으로 체계화시킨다. 또한 다이어그램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복합적인 생각과 생각 사이의 관계들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사고의 전개과정에 있어서의 논리성이나 새로운 파생적 관계성을 보다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도와주고, 더 나아가 설계자의 생각이 유연한 형태로 구체화됨으로써 실체적인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디자인 매체design media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림10] Montjuic Waterfront District. 간단한 텍스트만으로 대상지에서 받은 느낌을 정리해 보았다. 대상지 주변의 여러 프로그램들이 서로 관계 맺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음이 더욱 쉽게 파악되었다. 텍스트의 방향성을 조정하고 연장하는 방식으로 대상지의 프로그램들을 구상했다. 이러한 간단한 작업을 통해서도 프로젝트의 기본 방향, 설계자의 관점은 형성될 수 있다.
8.
생성적 다이어그램[1]은 객관적인 정보들을 본인의 느낌이나 직관과 같은 주관적인 정보들과 재조합하여 개인적인 디자인 언어로 재생산한 설계자 본인을 위한 감흥 기록장치感興記錄裝置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쉽게 이야기하면, 대상지에 대한 설계자만의 이해를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기록하는 일종의 ‘설계자만의 개인적인 디자인 노트’인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생성적 다이어그램이 디자인 매체로서 평가받는 다양한 가능성이 숨어 있다. 그것은 획일화된 분석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고, 그로인한 다양한 해석은 곧 개성 있는 디자인의 직접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조경 디자인은 합리적 객관성과 작가적 주관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태생적으로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과 주관, 과학적 분석과 직관이 항상 동등한 위계로서 공존하여야 한다. 생성적 다이어그램은 설계자 본인의 눈으로 보다 다양하고 유연하게 대상지를 읽고 쓰는 개인화된 분석 도구로서, 조사와 분석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객관과 주관의 불균형을 보완하고, 더 다양한 대상지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디자인 매체로서 설계자의 생각을 시각화함으로써 그 관계성을 보다 쉽고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이것이 생성적 매체, 즉 생각도구Thinking device로서 이해되는 이유이다.
[1] 생성적 다이어그램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배정한 교수님의 ‘현대 조경설계의 전략적 매체로서 다이어그램에 관한 연구(2006)’을 참고하기 바라며, 다양한 사례들은 나의 블로그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http://www.cyworld.com/interface_landscape)에서 확인할 수 있다.
9.
내곡 보금자리지구 조경현상설계(2010)는 행정구역상 서울에 위치하지만 서울과는 다른, 내곡 만의 경관을 탐구하는 작업이자 잃어버린 서울의 경관성을 탐구하는 작업이었다. 조사와 분석과정의 시작은 내곡을 처음 찾았을 때 느낀 ‘포근함’이라는 단편적인 감흥에서 출발하였다. 그 느낌의 원인이 무엇일까? 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대상지만의 잠재력인 포근한 지형 구조를 발견하고, 그 구조에 담긴 의미와 기능들을 분석함으로써 차별화된 설계 개념과 전략을 이끌어 내고자 노력했다.
[그림11] 대상지 중 훼손지복구용지(비오톱관찰원)에서 주변의 경관을 360도 연속 촬영 후 지형도와 겹쳐보았다. 대상지가 크고 작은 능선들에 의해 중첩되고 사방으로 위요되어, 자연이 따사롭게 대지를 품은 듯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10.
처음 시작은 당연히 내곡에서 부터였다. 현장을 다녀온 뒤 내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았던 첫인상은 현장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포근함'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하고 생각될 정도로 대지는 자연에 완벽히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내곡만의 이 '포근한 경관'을 형성하는 인자들이 무엇인지 궁금해 졌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곡 지구의 지형도와 항공사진을 펼쳤다. 현장에서 파악할 수 있었던 대상지의 경관적 특성은 청계산, 구룡산, 인릉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는 것과 청계산과 인릉산 방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크고 작은 능선들의 중첩성이었다.
11.
일단 내곡 지구의 지형을 능선들ridges을 따라 선으로 이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몇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내곡의 위요 지형이 일종의 시력검사에 쓰이는 알파벳'C' 형태의 원circle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이러한 원형으로 위요된 지형이 마치 프렉탈fractal의 자기 반복적 형태처럼 반복되는 중첩의 위요 지형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며, 독립된 구조가 아닌 하나의 능선을 공유하는 탄젠트 서클tangent circle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셋째는 이러한 탄젠트 서클의 지형 구조가 내곡 지구만의 독립적 특성이 아닌, 서울이라는 커다란 분지의 외곽 경계를 아우르는 경관 체인 landscape chain의 형태로 확장되며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림12] 처음 대상지를 둘러싼 산들의 봉우리(십자가)와 능선을 따라 트레이스를 하던 중, 이것이 완결적이지는 않지만 대략의 위요된 서클enclosed circle형태를 가지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원 내부의 작은 봉우리들과 주변의 봉우리들을 따라 트레이스를 하면서 이 원들이 탄젠트 서클tangent circle의 구조로 결합되어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러한 탄젠트서클tangent circle의 결합구조는 서울이라는 커다란 분지의 외곽을 따라 체인chain처럼 이어져 중첩된 경계경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2.
우리는 이 흥미로운 경관 구조를 '연속된 탄젠트 서클 지형 경관'이라고 정의하였다. 우리가 처음 내곡에서 느낄 수 있었던 한 폭의 수묵담채화 속 경관과 같은 그 포근함의 근원은 ‘탄젠트 서클 지형 경관’이라는 단위 경관구조landscape unit가 가지고 있는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점차 높아지는 지형 경관에 의한 '위요성과 중첩성', 그리고 단위 경관구조의 연속에 의한 '경관적 깊이감(두터운 경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할 의문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 경관 구조가 도시 구조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며, 도시 전체의 경관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하는 점이었다.
13.
관심은 자연스럽게 서울이라는 이제는 메트로폴리탄이 된 역사적 도시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하게 접해 왔던 겸재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한양의 풍경이 내곡에서 느꼈던 포근함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양 역시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에 의해 둘러싸인 작은 분지형 도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지형구조와 도시의 경관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으로 지형 구조가 갖는 경관적 기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약 5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한양이라는 작은 도시가 메트로폴리탄으로 변모하기까지 경계의 변화가 도시의 경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비교함으로써 이 경관적 지형구조의 특성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림13] 500년전의 서울은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으로 대표되는 수 많은 탄젠트 서클의 지형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의 도시였다. 개발의 광풍이 이 작은 도시를 매트로폴리탄으로 만드는 동안 한양의 경관적 경계를 이루고 있던 수 많은 능선들은 사라지고 콘크리트의 건물들이 그 자리를 빼곡히 채워왔다. 다이어그램에서 보이는 한양의 경계와 현재 서울의 경계 사이의 하얀 여백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14.
탄젠트 서클 지형의 경관구조 I: 입면적 중첩 의한 두꺼운 경계 경관. 겸재는 한양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안개라는 의도적인 장치를 이용해 생략한 채, 남산 넘어 끊임없이 중첩되는 산자락들을 몽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쉽게 지나쳐 왔던 중요한 점이 숨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중첩의 경관이 한양 내부의 경관이 한양 밖의 경관, 즉 한양 경계 영역의 경관이라는 점이다. 겸재가 바라본 한양 밖의 산자락은 아득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겹겹히 한양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의 깊이는 겸재가 서 있는 한양을 한 없이 포근한 둥지로 만든다. 우리는 겸재의 그림에서, 그리고 내곡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이러한 포근함이 한양과 내곡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부의 입면적 경관의 두께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꺼운 경계 경관'과 탄젠트 서클의 지형구조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겹쳐져 있는 산자락들, 그 입면의 레이어들은 근경에서 원경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며 아득한 깊이로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된 위요 지형들이 갖는 거리와 높이의 비례적 관계에 의한 점진적인 위요가 궁극적으로 포근하고 아득한 경관을 형성하는 주요소가 되어왔다. 각각의 다른 접점을 갖는 '탄젠트 서클'이라는 결합 방식에 의해 입면적 지형이 중첩됨으로써 보다 깊이감 있는 경관을 형성하고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한 중첩 경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림14] 겸재 정선의 '장안연우(長安烟雨),1741'.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른 도성의 모습을 백악산 기슭에서 그렸다. 남산 뒤로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 우면산이 아련하게 늘어서 있다.
[그림15] 입면적 중첩의 경계 경관은 고지도를 통해서 그 구조를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김정호가 작성한 '수선전도'는 한양의 도시구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한양이 가진 배산 임수의 풍수지리적 입지 원리를 잘 보여준다. 특히 북악산-북한산-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북측 경계부는 입면적 중첩 경관이 차지하는 공간적 범위를 입면과 평면의 동시적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 경관에서 입면 중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서울의 북측 경계부는 평면적으로도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높고 낮은 여러 겹의 중첩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5.
탄젠트 서클 지형의 경관구조 II: 휴먼스케일의 도시. 1960년의 서울. 지금으로 부터 불과 50년 전의 서울은 그 두꺼운 경계의 경관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었다. 한 가지의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것보다 사진 속의 서울의 경계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서울은 메트로폴리탄으로 급성장을 거듭하면서 서울의 ‘안쪽 경계’를 형성하던 낮은 탄젠트 서클 지형의 녹지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서울의 경관적 경계 역시 지속적으로 빠르게 후퇴하며 도시의 공간적 스케일은 더 이상 인간의 척도로는 가늠할 수 없게 변화하였으며, 이는 도시의 심리적 공간감의 변화, 즉 포근한 경관의 상실을 가져왔다. 서울이 가지고 있던 휴먼 스케일의 경관, 서울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었던 그 서울의 포근한 경관은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림16]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머물렀던 스모더씨(Leroy Smothers)가 1960년 이태원 부대 숙소에서 한강과 강남을 배경으로 그의 아들인 빌 스모더씨(Bill Smothers)를 찍은 사진이다. [사진_하] 위 사진의 주인공이었던 빌 스모더씨가 2006년 비슷한 위치인 그랜드 하야트 호텔 테라스에서 찍은 서울의 모습이다. 두 사진을 통해 46년간 서울이 겪은 경관적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도시의 확산은 도시의 공간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www.flickr.com/photos/smothers
16.
탄젠트 서클 지형의 경관구조 III: 공존을 위한 다공질의 생태적 네트워크. 개발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도시들은 자연이라는 큰 바탕 위에서 지형적 한계에 순응하며 입지가 결정되었으며, 그 규모 역시 각각의 지형의 크기 안에서 결정되었다.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생태적 팡게아ecological pangea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커다란 생태적 매스 내부의 작은 독립된 조직으로 기능하며 공생하여 왔다. 이는 마치 세포벽이 세포를 보호함과 동시에 세포 사이를 끊김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각 세포들이 지속적으로 생장할 수 있도록 모세혈관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생태적 바탕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를 도시와 생태가 공존하는 다공질의 생태적 네트워크porous ecological network로 정의하였다.
[그림17] '경조오부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을 하나의 커다란 '생태판ecological pangea'라고 보고 지도상의 지명이 쓰여진 곳마다 작은 구멍을 내 보았다. 맨 위의 지도에서 언뜻 볼 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촌락이 한양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이 확연이 느껴진다. 마치 펀치로 아무렇게나 구멍을 내놓은 듯 한 타공판의 모습으로, '판'은 '판'으로서 '구멍'은 '구멍'으로서 각각의 성질을 유지하며 '다공질의 면적 네트워크porous surface network'는 작동된다.
17.
내곡지구의 조사와 분석과정은 대상지에서 느꼈던 단편적인 감흥에서 출발하여 그 감흥의 원인과 파생되는 질문들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대상지만의 잠재력인 탄젠트스케이프tangent-scape라는 차별된 개념을 찾고, 그 가능성을 검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실제 현상 설계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구체적인 설계전략으로 발전되었다. 물론 모든 프로젝트가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는 없겠지만, 설계 때마다 설계자는 자신으로부터의 목소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결국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을 그리는 행위이며 감흥을 구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2 - 생각도구; 감흥기록장치
text_김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