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김현민
스튜디오일공일 소장/공동대표


이 글은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 314호(2014.06)에 개재되었던 글의 원본글입니다. 잡지에 개재된 글과는 일부 내용이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1. 
언제나 그렇지만 설계라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분야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집약적인 10,000시간, 약 10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의 공황상태를 종종 겪는 것을 보면 나는 조경에 참 재능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조경 디자인은 항상 정답은 없고, 오답만 가득하다는 선배들의 흔한 우스갯소리처럼 내가 그려낸 생각과 감흥을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시키고, 그 감동을 전이시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러한 선배들의 우스갯소리가 여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 만큼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나름의 확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할 때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실 타인 이전에 나를 설득시키고, 나 스스로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들이다. 



2.
조경造景은 글자 그대로 경관景觀을 만드는 행위이다. 실제의 경관이 장소를 구성하는 다양한 물리적 구성 요소들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그 장소만의 공감각적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처럼, 경관을 디자인하는 것 역시 대상지라는 물리적 바탕과 그 장소를 채우게 될 새로운 물리적 구성 요소들의 조합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근본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설계자만의 깊이 있는 개념과 태도도, 남다른 눈으로 해석한 대상지의 의미와 감흥도, 경관적 컬티바landscape cultivar로서 새로이 장소를 작동시키기 위한 창의적인 전략도 물리적인 디자인 없이는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모든 과정들이 그 장소에 가장 적합한,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물리적 디자인을 위한 과정인 셈이며, 결과물로서 디자인된 물리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경관적 감흥이 미학적 가치를 갖고, 이용자들로부터 사랑 받을 때 그러한 과정들도 비로소 의미를 더하게 된다. 혹자의 말처럼 어쨌거나 우리가 디자인하는 물리적 경관은 일단 예쁘고 봐야한다. 그래야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림1,2] North Corridor Plan, Bangalore, India_2005
대상지 분석 모형(상). 조사, 분석을 통해 대상지의 주요 정보를 mapping하고 이를 단순화시킨 3차원적 다이어그램 모형이다. 지형 단면 위에 필요한 정보들을 코드화시켜 표시함으로써 계획 시 분석 내용들을 보다 쉽게 공간과 연결지어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스튜디오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대상지 게임보드 모형(하). 각재를 이용하여 그리드로 구획된 지역의 평균 지형 레벨에 맞게 자른 후, 한 쪽 면에 향측도를 핸드 프린트했다. 계획안의 변경에 대한 즉각적인 스터디가 가능하도록 제작된 모형이다.

3.
무언가를 실제로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많은 경험과 검증을 필요로 한다. 경험 많은 작가일수록 보다 안정적인 결과물을 담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그 만의 노하우가 된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 조경은 잡학이다. 가장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디자인 단위라 할 수 있는 경관을 다루다 보니 비슷한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 더욱 많고, 그러한 요소들 간의 모든 조합을 경험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수많은 현장 경험을 수십 년간 해온 대가가 아니라면, 당연히 디자인과 실제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실하게 디자인을‘검증’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머리가 아니라 눈과 손을 통해 이루어 질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때 모형model을 통한 스터디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가장 손쉽지만 가장 효과적인 검증도구가 된다. 

[그림3,4] Children’s Island Plan, Prague, Czech_2006
계획은 대상지에 필요한 시설을 선정하고 이를 대상지의 경계와 상관없이 배치한 후 이를 쌓아 올림으로써 복층의 공원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여러 개의 배치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를 OHP필름에 칼라 인쇄하여 접어 올려 플랜을 완성한 후, 각 시나리오의 경관적 장점과 문제점을 검증하고 이를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하였다. 간단한 필름 한 장만으로도 충분한 스터디가 가능하다. 스터디 모형은 그 내용에 맞게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을 취하여야 가치가 있다.



4.
시간이 허락하는 한 경험해보지 못한 디자인과 실제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모형 스터디 작업을 시도하고자 노력한다. 단순히 최종적인 디자인을 재현하는 프레젠테이션 도구로서의 활용을 넘어, 3차원적인 대상지의 현황을 보다 쉽게 이해하는 분석도구로서, 개념적인 전략이 대상지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여 그로부터 대상지만의 시스템을 도출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계획안의 형태, 스케일, 공간감 등을 빠르게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디자인 도구로서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모형의 활용은 실제화에 있어서 복잡한 구조물의 기초에서부터 마감까지 실제 시공의 전 과정을 가상적으로 선행해 봄으로써 시공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순서상의 오류를 파악하고 시공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되기도 한다.




‌5.
모형을 통해 디자인 스터디를 하는 경우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실제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직접 모형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단순히 대상지 지형을 재현하는 모형이나 전체적인 베이스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누가 하여도 상관이 없겠지만, 디자인 스터디 모형의 경우 제작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과정이 되므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디자이너가 직접 깨닫고, 느끼고, 수정하면서 디자인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모형 제작이 2-3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아주 디테일한 스터디를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형 제작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그래야 효율적인 스터디가 가능하다. 세 번째는 디테일한 설계를 제외하고는 디지털 모형digital model보다 물리적 모형physical model을 만들도록 한다. 화면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야 하며, 손을 통해 디자인을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다. 넷째는 재료 선정 시 가급적이면 모형용 소재들을 벗어나 스케일과 재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소재를 찾도록 한다. 다섯째는 쉽게 분해되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스터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림5] 문정지구 어린이 시설 계획_2010
다양한 높낮이의 선형 데크 다발로 이루어진 어린이 공원을 제안하였다. 각각의 데크를 나무 재질로 표현하지 않고, 각 데크의 특성과 이루어 질 수 있는 행위를 이미지와 텍스트로 정리하여 표현하였다. 개념적 다이어그램과 3차원적 공간이 결합되어 보여짐으로써 개념과 성격, 형태간의 동시적 이해를 돕는다.

[그림6,7] C 호텔 외부공간 계획_2012
유점토는 지형을 스터디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모형 소재이다. 대상지는 주변 도로에 의해 남측으로부터 서측 대각선 방향으로 약 3m의 레벨차를 가지고 있었다. 단차를 극복하면서 지형적 조형미를 연출하여야 하는 디자인에 있어서 유연한 소재는 매우 효과적인 디자인 도구가 된다.

6.
Gubei Pedestrian Promenade Central Folly(2009).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디지털과 물리적 모형은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센트럴폴리는 상하이의 대규모 주거단지 내의 보행자가로인 Gubei Gold Street의 중앙 광장에 설치된 카페, 매점, 꽃집, 관리실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편의시설이다. 폴리 디자인의 거의 모든 과정은 디지털로 이루어졌다. 기본구상 단계에서 부터 디자인은 라이노3D를 이용하여 완성되었고, 프로그램으로부터 추출된 평면과 단면, 입면을 베이스로 모든 캐드 도면이 작성되었다. 유일하게 디지털로 진행되지 않은 부분은 바로 디자인의 검증단계였다. 디지털모형은 정교함에 있어서는 뛰어나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모니터의 한계 탓인지, 가상공간의 왜곡된 화각 탓인지, 대상을 통합적으로 관찰하고 인지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마우스의 반복된 클릭과 옵셋offset이나 카피copy 같은 명령어 없이 손끝으로 느끼면서 하나하나 완성되는 과정의 정교함은 디지털 세계의 오차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아닐까 생각된다.

7.
디지털 모형의 도면적 활용은 예측을 넘어 결과물의 시공성을 높일 수 있는 보다 실질적인 수단이 된다. 신세계백화점 의정부점 옥상정원 S-Garden (2012)의 경우, 대상지 전체의 지형을 스케치업을 통해 조형적으로 디자인하고 수평적 섹션작업을 통해 10cm 간격의 등고선을 추출한 후, 도면화하고 시공했다. 특히 고무칩포장으로 조성된 추상지형정원의 경우 놀이 공간으로서의 이용성뿐만 아니라, 주변 동선으로부터의 조형미를 고려하여 각각 언덕의 높이와 형태, 중첩성 등을 3D작업을 통해 디자인하였다. 우리나라는 설계 시 지형의 조형뿐만 아니라 Grading Plan-배수 및 지형변화에 따른 각종 마감레벨, 구조물의 레벨에 대한 정확한 제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체적인 구조의 기준과 바탕이 되는 바닥면의 조성을 현장여건에 맡긴 상황에서 정밀한 시공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정확한 Grading Plan은 포장 패턴과 같은 미세한 경관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S-Garden의 포장광장은 배수 트렌치가 광장의 중앙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건물입구에서부터 포장공사를 진행할 경우 트렌치 연접부에서의 포장 블럭의 애매한 절단을 피할 수 없었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포장재의 절단은 정밀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몰탈로 적당히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판석포장의 시공 시작점을 지정하고, 시작점으로부터의 배수경사도를 고려하여 포장 메지를 포함한 평면상의 포장재 규격을 계산한 뒤 온장으로 포장이 가능한 지점을 계산하여 배수트렌치의 위치를 결정하였다. 공사계획평면도에 계산된 규격에 맞게 실제적인 포장재의 전체 배치를 그려줌으로써 포장평면만을 가지고 시공이 가능하도록 작업하였다. 또한 시공과 도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포장단면도 역시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사모래(시멘트-모래 혼합포설) 시공방식을 적용하였다.

8.
서울교육대학교 강의동 중정 ‘식영원息影園’(2014)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평생교육관, 미술관 등으로 둘러싸인 녹지를 구내 카페(다솜채)와 연계된 중정으로 조성하기 위한 계획이며, 한경대학교 안승홍 교수와 공동 작업하였다. 기존의 녹지 내에서 오랫동안 자라왔던 대형 수목들을 학교의 역사를 간직한 서울교육대학교만의 유적으로 생각하고 학생들이 편안하게 이용하면서 이를 기념할 수 있는 상징정원으로 계획하고자 하였다. 디자인의 방향은 기존의 대형 수목들을 존치시키고, 거울연못을 통해 나무의 물그림자를 보여주거나, 수목들 사이를 감싸고 돌아가는 돌담의 거친 질감과 빛의 기둥을 돌담 사이에 끼워 존치수와 병치시킴으로서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전체적인 경관을 구성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우선 기존 수목 중 남겨야할 수목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작은 녹지 안에 다양한 수종과 크기의 수목들이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케치업 모형을 통해 실제 수형과 유사한 수목을 맵핑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시각적 개방감을 고려하여 이를 선정하였다. 중정이라는 특성 상 각각의 시점으로부터의 경관을 고려하여 개별 구조물들의 위치와 크기, 높이를 결정하여야 했고, 이 과정에서도 3D 작업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거울연못의 경우 다양한 위치에서 서로 다른 나무를 비추도록 세팅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구조적인 결정뿐만 아니라 식재와의 간섭여부 까지도 검증하는데도 3D 작업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9.
서울교육대학교 중앙잔디광장 ‘유양원游陽園’(2014). 식영원과 함께 계획된 대학 본부 앞 잔디광장으로 본부 앞이라는 입지와 중앙 녹지라는 의미에 맞도록 간결하지만 힘이 느껴지고, 상징적이지만 포근한 위요감을 느낄 수 있는 경관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고민이 되었던 부분은 식재였다. 계획에서 식재는 대상지의 공간감과 색채, 기능성 등 전체적인 경관 디자인의 기반이자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식재계획을 스터디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모형이 필요했다. 중앙잔디광장의 모형은 우리가 흔히 투시도 CG컷을 만드는 방식과 동일하다. 일반적인 CG의 과정에서 물리적인 구조물은 3D프로그램을 통해 만들고 렌더링한 후 식재는 포토샵에서 입면의 이미지를 조합하는 일종의 포토 콜라주방식photo collage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물리적 콜라주 모형physical collage model을 만들 수 있었다. 모형을 통해 식재의 수종, 크기와 위치, 간격 등을 조정하였으며, 통합적인 경관을 스터디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10.
서울교육대학교 중앙잔디광장 ‘유양원’ 내 조형폰드 구체도. 계획된 폰드는 사실 겉보기와는 달리 꽤 복잡한 구조물이다. 2m 높이의 가벽으로 시작된 폰드는 깊이가 얕은 디딤석 구간을 지나, 본 수조가 되고, 환경조각품이 놓일 단상과, 경사면이 연못 바닥까지 연장되어 디자인된 경사 플랜터로 끝이 나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경사 플랜터의 경우 전면은 45도 기울어지고, 측면은 34도 기울어져 있다. 각각의 기초들은 모양이 다르지만 침하를 우려해 하나의 구체로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 복잡한 구조물의 시공 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라이노3D를 활용한 구체, 몰탈, 마감, 두겁석까지 포함된 디지털 모형을 만들어 구간별 단면과 마감 및 두겁석의 규격을 추출하고 도면화하였다.

11.
하나의 좋은 장소, 경관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에 내가 디자인한 곳이 시공되는 현장이 있어 자주 찾곤 했다. 나름 최선을 다한 설계였는데, 공사의 매 단계마다 ‘더 고민할 걸, 내가 왜 이렇게 생각했지?’하는 아쉬움에 자책하게 되었다. 조경은 정말이지 하면 할수록 더 힘들게만 느껴진다.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가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인 인재진 교수가 쓴 새 책의 제목에 작은 웃음이 났다. ‘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 그리고 청춘이 끝나기 전에 이 찌글찌글함을 더 열정적으로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찌글찌글함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각과 새로운 실험들을 끝나지 않게 만드는 에너지가 아닐까? 아직은 여전히 축제다.




‌< 끝 >그들이 설계하는 법 3 - 디자인 검산법; 경관 모형 실험
text_김현민